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27년 화교배척폭동 (문단 편집) ==== 배경 ==== 한국으로 이주한 화교 노동자들은 대체로 인천항을 이용했다. 1923년 1월부터 3월까지 인천항으로 입국한 노동자는 만 명에 달했다. 1924년에도 인천항으로 입국한 노동자들이 6개월에 2만여명으로 집계됐다. 1925년에는 3월에만 5천여 명이 들어왔다.[* 석사학위논문, 김희용, 日帝强占期韓國人의 華僑排斥, 2009, 9~10] 인천항은 한 때 한국의 현관이라 불렀다. 다만 경부, 경의선이 완전 개통하자 이후 인천항은 한국의 현관(玄關)이라는 기능은 부산에 넘겨주었다. 그러나 지리에 따른 이점으로 여전히 대중국무역의 중요거점이라는 기능을 유지하였다. 인천항의 수출입은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의 호경기와 인천항 선거(船渠) 준공에 따른 항만의 확충과 해륙연락 설비의 개선에 힘입었다. 수출입액 총액은 해마다 늘어나 1919년에 9,098만원을 기록했는데 1909년 1,667만원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늘어난 것이다. 1920년 불황이 있어서 전년보다 감소했지만 대외교역 총액은 1922년에 1억 원을 돌파했다. 인천의 대외교역은 1928년까지 꾸준하게 성장했다.[* 다만 세계적인 대공황의 영향으로 1929년 전년보다 1할 가까이 감소하였고 이 현상은 1931년까지 이어졌다.][* 김영신, 日帝時期 在韓華僑(1910~1931) - 仁川地域 華僑를 중심으로, 16, 인천학연구 4, 2005.2, 222] 1924년 8월 법률 제24호 「사치품 등의 수입세에 관한 건」67)이 공포되어 중국산 견직물에 대한 관세율이 배나 인상했고 중국산 견직물의 주된 수입항이던 인천항의 대중수입 총액은 전년과 비교하면 감소하였다. 이 때문에 중국 견직물 상인들이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화교 상인의 경쟁력은 여전히 위력이 있었다. 수입무역에선 중국산 마포 및 견포 등이 독점수입되다시피 했다. 그리고 화교 상인들은 중국 본국에 본점 혹은 지점 내니 유력한 자본가를 배경으로하여 자본이 풍부해서 다른 타국상인들은 쉽게 지위를 넘볼 수가 없었다. 일본 제품인 면포 및 잡화류 등은 이전에는 재한일본인 상점에서 취급했으나 인천지역 화교 상인들은 한신(阪神)지방에 머무르던 중국 상인에게 위탁을 받아 직접 일본에서 수입하여 팔았다.[* 김영신, 日帝時期 在韓華僑(1910~1931) - 仁川地域 華僑를 중심으로, 21, 인천학연구 4, 2005.2, 227] 인천 화교 상인들이 1930년까지 무역활동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은 또 있다. 인천에는 인천의 산동 출신 화교들로 구성된 북방(北幫)이 기선을 소유하여 인천과 연태간에 화물과 승객의 운송에 편리를 제공했다. 종래 인천-연태간의 해운권은 일본 阿波國共同汽船株式會社가 장악했다. 이 회사 소속의 공동환(共同丸)은 조선총독부와 관동청의 보조를 받고 인천-연태(芝罘, 기항지)-대련간을 운항하였다. 이 항로의 여객과 화물은 거의 전부 중국과 관련됐으나 공동환은 중국인 승객과 화물에 대해 수시로 차별을 가하였다. 일본의 항운업 독점에 화교 상인들의 불만이 쌓여갔다. 그러다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화교 상인 중 재력이 있는 몇몇이 공동출차하여 즈푸(芝罘)에 본점(本店)을 둔 윤선회사(輪船會社)를 섭립하고 일본한테 구우선 살마환(舊郵船 薩摩丸)을 사서 이통호(利通號)로 이름을 바꿔서 1922년 9월 대련-지부-인천간을 운행하였다. 이통호는 인천-연태간을 매주 한번씩 왕복하면서 화인(華人)의 여객과 운송에는 우대조치를 하였고 운항 뒤 영업 상태도 양호했다. 이통호는 정부의 보조곰은 한 푼도 받지 못했으나 화교들에게 적극으로 후원을 받았고 공동환과 경쟁할 수 있었다. [* 김영신, 日帝時期 在韓華僑(1910~1931) - 仁川地域 華僑를 중심으로, 21~22, 인천학연구 4, 2005.2, 227~228; 김승욱, 20세기 초(1910~1931) 인천화교의 이주 네트워크와 사회적 공간, 중국근현대사연구 47, 2010.9, 33] 일제강점기 인천지역 화교의 상업으로는 크게 직물류 수입, 서양 잡화, 잡화소매, 약재, 양복점 음식점, 환거래상 등을 꼽을 수 있다. 일제강점기 초기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영업을 진행하던 대형 직물류수입상은 덕순복(德順福), 영래성(永來盛), 화취공(和聚公), 협태창(協泰昌), 인화복(人和福), 화태호(和泰號), 삼합영(三合永), 취원화(聚源和), 협흥유(協興裕), 동화창(東和昌) 등 11개 상점으로 30명의 점원을 두고 직접 수입한 직물류를 전국 각지에 팔았다. 면포(夏布)는 한인의 옷감으로 애용됐는데 1924년 일제는 이것을 사치품으로 규정해 제재하여 중국산 하포 수입에 타격을 입혔다. 하지만 한국산 하포는 질이 낮고 생산량도 많지 않아 세금을 무섭게 매긴 후에도 중국산 하포 수입은 늘어났다. 인천에는 화교 상인이 운영하던 면포점이 적지 않았는데 源生東․和聚公 등은 전국적인 판매량을 확보한 대규모 면포상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또 화교 상인이 운영하던 잡화소매상, 음식점, 이발관(이발소) 등은 중국인뿐만 아니라 조선인과 일본인도 상대하였다.[* 김영신, 日帝時期 在韓華僑(1910~1931) - 仁川地域 華僑를 중심으로, 22, 인천학연구 4, 2005.2, 228] 화교상인들의 인천상권 장악 현상에 대해 인천상공회는 다음과 같이 판단했다. >『소화 2년(1927) 인천항의 수이출입 무역액 가운데 중국상인의 취급액을 보면 합계 1천 8백만 원 이상으로 당항(인천) 총무역액의 1할 4분에 상당한다. 더구나 이출무역의 대부분은 미곡에 집중되어 있는바, 이를 제외한 기타 수이출입 합계 7천 9백만 원에서 다시 홍삼․엽연초․석유․철도건설제료 및 기계류 등 전매품 및 특허품 합계 1천만 원을 공제한자유상품 대비 비율은 3할에 이르는 것이다. 이 가운데 대중무역은 수입에서는 8할 5분, 수출에서는 6할이 중국상인에 의해 장악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인천의 내선상인들은 밖으로는 상권의 황폐화, 안으로는 중국상인에 의한 상권잠식에 시달려 앞뒤로강적을 맞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인천상권을 장악하여 많은 경제적 이익을 얻은 화교 상인들은 해마다 엄청난 돈을 물품 대금 혹은 여타 명목으로 본국에 송금했다.[* (김영신, 日帝時期 在韓華僑(1910~1931) - 仁川地域 華僑를 중심으로, 23, 인천학연구 4, 2005.2, 229] 인천에서는 농민들도 다른 곳과 비교하면 안정된 활동을 유지했다. 인천의 농민 인구는 상인 운구보다 많았다. 이 농민들은 1911년부터 인천농업공인회(仁川農業公議會)라는 공동판매기관을 설립하고 인천과 그 주변에서 야채 생산에 종사해 오며 그 유통 과정에도 개입해 야채 재배업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점했다.[* 김승욱, 20세기 초(1910~1931) 인천화교의 이주 네트워크와 사회적 공간, 중국근현대사연구 47, 2010.9, 33~34] 이런 한국 화교 사회는 다른 지역 화교 사회와 다른 모습을 보였다. 예로 미국과 유럽 화교들은 노동자들이 다수인데 한국은 농업 종사자도 적지않았다. 인천지역은 개항 직후부터 화교가 빽빽하게 모인 데다 일본인들까지 화교 농민들이 만든 소채(蔬菜)를 좋아해서 중국인이 경영하는 농업이 가장 먼저 이루어진 지역이다. 농업생산을 통한 소득도 상당했고 인천의 소채재배업은 종래 중국인이 독점하다시피 하였다. 인천과 인근 지역에 머물러 살던 화교상인들은 인천지역 채소시장을 더욱 확실하게 장악하기 위해 1911년 공동판매기관 성격인 인천농업공의회(仁川農業公議會)를 만들었다. 화교상인의 생산은 주로 인천 부근 부평군(富平郡) 주안면(朱安面)에 집중됐는데 생산액은 연 8~10만원에 이르렀다. 주된 소비자는 인천지역 화교였지만 다른 지역에도 공급해서 한국인과 일본인도 주된 소비층이었다. 인천지역 화교 소채재배농은 1호당 평균경지면적이 한국평균 1호당 경지면적의 절반 정도일 뿐이었다. 화교들은 이런 좁은 땅에서 봄·여름·가을·겨울에 각각 제철 채소를 재배했는데 좁은 땅에서 봄부터 겨울 채소를 돌아가면서 재배했다. 그리고 화교 농민들은 채소 재배에서 수요와 공급 관계를 면밀히 연구했다. 예를 들면 겨울철 채소값이 뛰어오를 때는 배추나 무 등을 밭에서 땅을 파고 저장하여 두었다가 다음해 1월경에 시장에 내다팔았다. 인천은 개항 후 항구도시로 발전해 시가지도 넓어져서 부내(府內)에 농경지가 많지 않아 다른 곳과 비교해서 농업은 상대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대신 그 주변인 부평 등지를 중심으로 과수원이 발전하는 상태였다. 인천지역 농업생산은 적고 부진했는데 중국인들은 농업생산에 성공을 거뒀다. 그리고 화교 농민들은 농작물을 팔 때 다음과 같은 방식을 사용했다. 한국인이나 일본인 재배농이 자신들과 같은 상품을 팔 때는 엄청난 염가로 팔았고 그렇지 않으면 이익을 독차지해서 수입을 올렸다. 인천부에서는 필요한 채소의 7할은 화교 농민이 공급했고 이런 채소를 사고파는 일도 화교 농민이 스스로 공동경영하는 시장에서 하였다.[* 김영신, 日帝時期 在韓華僑(1910~1931) - 仁川地域 華僑를 중심으로, 26, 인천학연구 4, 2005.2, 230~232] 이런 이유로 경쟁하던 조선인들은 화교들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느꼈으며 인천에서 좋지 않은 분위기가 흘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